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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인민주권

 
 저자는 직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인구가 수십만 이상이고, 각자 삶의 환경이 다른 현대 국가에서 인민에 의한 직접 통치의 실제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이념적으로 멋져 보이지만,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 분업화 전문화의 영향으로 각자의 삶의 환경과 그에 따른 정책적 지향이 다른 점, 또 다수로부터의 개별적 의견을 하나의 의견으로 집합시키는 완벽한 방법의 부재 등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이 부분에 공감한다. 이 책은 개인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이전인 1960년대 쓰여진 책이다. 디지털 기술이 급격히 확산되는 2000년 즈음에 원활한 정보 소통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에 다가서려는 희망이 여러 곳에서 발화했으나, 이 기대는 2020년대쯤에는 사그라진 듯 하다.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의 구현이 정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헛된 목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실세계의 정치과정을 설명한다. 먼저, 현실세계의 정치를 "갈등을 발견, 확대(사회화)하고, 조정, 진화시키는 체계"로 해석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특정 사업장의 고용주와 노동자 간에 사업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에 있어 갈등이 있다고 하자. 그 갈등의 원인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고용주의 무리한 착취로 볼 수도 있고, 노동자의 무리한 요구로 볼 수도 있다. 정치는 이러한 갈등에 프레임을 부여하고 참여자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예를 들면 고용주의 착취로 해석하고 노동조합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일반 대중에게 주창함으로써 갈등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갈등에 관여하는 참여자가 확대되는 경로와 수준에 따라 힘의 균형과 갈등 해소의 결과가 결정된다. 이 정치과정이 직접 민주주의와는 다른 현실세계에서 유권자의 주권이 반영되는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현실 민주주의에 대해 "지도자와 조직이 공공정책에 대한 대안들로 경쟁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로 해석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핵심 주체는 정당이다. 저자의 정치해석 이후로 정당론이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다. 사회환경과 선거제도 등 제반 시스템에 따라 정당의 모습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시각도 있겠지만, 반대로 나는 정당이 시스템을 바꾸고 사회를 인도할 수 있는 주체라고 (아직까지는) 믿고 있다.
 
 저자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위 갈등관리체제에서 정부는 갈등의 확산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기제로 본다. 이 갈등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를 정부의 역량으로 본다. 또 하나는 자본권력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본다. 자본권력은 왕정 시대 이전부터 군사력 등 기타 권력과 일체화되어 있었으나, 근대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최초로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했다는 시각이다. 정부권력은 1인 1표로 창출되기 때문에 자본권력의 유지기제와는 완전히 달라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서로를 견제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나는 저자가 보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시각을 좋아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이론을 비판한다. 이익집단 정치 이론이란 이익집단 간의 갈등이 정부에 대한 압력으로 행사되고, 그 힘의 균형에 따라 정책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이론이 모든 유권자가 어느 집단에 속해서 공공정책에 대한 의견을 행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하고 있다고 보고, 이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특수 이익집단의 공공정책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크지 않다고 보는데, 이유는 갈등의 전선이 확대되면 갈등조정의 최종적인 결과는 특수 이익집단 등 최초의 관여자의 손을 떠나, 최종적인 힘의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특수 이익집단의 공공정책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저자와 시각이 조금 다르다. 갈등의 범위가 전국민적 규모인 이슈 - 예, 국민연금 - 는 저자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공정책에서 이 해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전문화됨에 따라 개별 공공정책 대부분은 겉보기에 특정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듯 보이고, 전국민에 미치는 영향은 모호해졌다. 그래서 그 공공정책의 갈등을 전국화하기가 어렵다. 결과적으로 공공정책은 해당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수 이익집단의 의도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기 쉽다. 정-경 간의 부패와 결탁의 결과라기보다는 해당 정책에 관여하는 정책결정자가 접할 수 있는 정보, 네트워크의 한계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사무관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사무관은 특정 영역에서 공공정책 문제를 해석하고 문서화해서,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을 실무적으로 진행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무관에게 최종  의사결정 권한이 전혀 없다. 다만, 사무관의 시야와 사무관이 접하는 정보는 문서의 방향을 좌우하고, 이것이 최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반면에 사무관은 생각보다 쓸데없이 매우 바쁘고, 떠먹여주는 정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떠먹여지는 정보가 바로 주로 특수 이익집단이 생산한 자료다. 특수 이익집단은 정보를 문서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게다가 특수 이익집단은 고위직과 긴밀한 인적 네크워크를 형성하고 있거나 그런 네크워크를 활용하고, 의사결정 각 단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려 한다. 반면, 정부는 특수 이익집단의 주장이 일반 국민, 자영업자, 노동자 등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을 감각적으로 추정할 뿐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문제점을 큰 맥락에서 파악해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을 대표하는 집단이 없어 문제를 파고 정보를 생산할 주체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검토가 진행된다는 사실 자체를 일반 국민이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갈등을 외부로 증폭시키는 걸 매우 싫어하고, 갈등의 최종 조정자가 되고 싶어한다. 사건의 진행을 적극적으로 공개하여 갈등을 사회화하는 일은 정부 방향에 부합하든 아니든,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기대하는 정부 역할에 위배되는 행태이다. 내가 함께한 대부분의 공무원은 선하고 일반 국민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구체적인 이익과 두루뭉술한 일반 국민의 이익의 균형추는 장기적으로는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의회에서의 논의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많은 정책이 상임위에 속한 몇몇 위원들의 지적 수준과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의원들은 특정 정책방향을 좀 더 큰 규모의 갈등 프레임으로 해석해낼 역량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상임위에서 의원의 역할은 제안된 정책이 소속 정당의 정강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고, 정강에 부합하도록 바꾸려 타 정당을 설득하는 것인데, 내 생각에도 너무 이론적인 접근이긴 하다) 지역구 득표라는 의원들의 유인구조를 볼 때 그런 역량이 만들어지고 발휘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 이익집단은 정치 엘리트와의 네트워크, 자본력을 통한 전문지식 및 문서생산을 통해 의회 정치과정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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