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업무와 소요시간
정책업무를 크게 구분한다면, 정책설계와 이해관계자 설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책설계는 특정 제도를 변경하거나 신설하기 위한 논리를 도출하는 것이다. 첫 단계는 제도가 바뀌어온 과정과 지금의 제도를 자세히 파악하고, 변경할 내용을 구상하는 것이다. 연금개혁의 예를 들면, 연금제도가 그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바뀌어 왔고, 어떤 장애물이 있었으며 어떤 공과가 있었는지를 파악한 뒤, 연금재정 고갈이 예상되니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조정해 가며 재정고갈을 늦춰보려는 방안을 구상해 보는 것이다. 이 단계는 제도의 나이가 많거나 복잡할수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노력으로 속도를 높여볼 수 있다. 책상에 앉아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인데, 기존 제도의 내용은 문서를 통해 습득할 수 있고, 새로운 제도를 구상하는 것도 머리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시간이 걸린다. 두 번째 단계는 정책 추진의 논거를 도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구체적 현실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 변화가 누구의 부담으로 누구에게 어떤 효과를 야기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효과가 민주성, 효율성, 형평성 등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해서, 어떤 가치는 포기하고 어떤 가치를 달성할지, 왜 그래야 하는지 등의 논리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논리 구조가 "진실"에 가까우려면, 정책의 효과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책대상자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각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정책이 그들의 삶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 시간을 들이면 정책의 질이 올라가고, 대충 하면 탁상공론형 정책이 나온다.
담당자는 정책대상자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통계를 활용한다. 행정부가 보유하고 있거나, 또는 새로운 조사를 통해 수집된 통계를 통해 정책대상자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통계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정보의 소실을 동반한다. 통계를 통해 정책대상자 집단으로서의 사회적 특징을 알 수 있으나, 개별적인 정책대상자인 개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균형 잡힌 정책은 반드시 통계에 기반해야 하나, 통계에만 기반해 만들어진 정책은 둔탁해서 문제를 예리하게 해결하지 못하기 쉽다. 얼마전 문체부를 퇴직한 사무관의 블로그에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구호를 외치는 공무원들이 나온다. 이는 정책실무와 현장과의 괴리가 구호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외친 구호인지 모르겠으나, 아직 그 괴리는 그대로일 것이다. 그 간극은 그 부서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행정부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통계 아래에는 정책대상자 개인들의 삶이 있다. 정책담당자들은 정책이 그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각양각색이고 무한한 각 개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랜 기간 함께 지내온 부부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관계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의 폭과 깊이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책담당자의 접근은 일반적으로 통계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통계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한데,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근저에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도 있다.
이해의 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제도개정은 구체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해 수준이 피상적인 수준은 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론적 구조의 이해를 넘어서, 구체적 삶의 변화에 대한 감각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통계와 논리와 개인의 이야기를 뇌에 집어 넣고 긴 시간에 걸쳐 주기적으로 되새김질하여, 그 정보 시냅스가 그간 살아오면서 구축된 기존의 뇌 회로와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뇌 회로상의 변화가 “체득”이고, 논리 이해에서 체득 단계로 가는 데 최소한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나는 인간 뇌를 그렇게 이해한다. 이 정도가 되면 정책대상자를 구체적인 삶으로 인식하고, 그들에 대한 상상이 뇌의 깊은 곳에서부터 개인적인 감정을 자극할 것이며, 이 감정은 정책을 좀 더 정확한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공무원 퇴직 후 핀테크 업체에서 규제변화를 설득하는 일을 했다. 2년을 꽉 채우고 조금 더 지나서야 규제 해소에 한 발짝 나아갔다. 그 사이에 나는 핀테크 업권을 구르며 이 업권을 상당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책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정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감각하고, 또 정부를 설득할 논리를 생각했다. 이 설득 논리가 정부 입장에서는 정책의 추진논리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느낌을 갖기에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무관 시절에 나는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추진 논리가 탄탄하더라도 이해관계자 설득은 또 다른 문제다. 정책이 좌초되지 않으려면 내외부 이해관계자에 대한 이해와 그들간의 관계, 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외부 이해관계자는 가장 중요하게 정책대상자를 변호하는 협회, 단체, 국회의원, 기자, 대통령실, 타 행정부처 등이 있다. 정책대상자나 집단이 규모가 큰지, 선거에서 의미 있는 투표를 행사할 수 있는지, 대통령실, 국회, 언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어떤 국회의원의 성향과 의지가 판세를 어떻게 바꿀지, 기자가 어떤 기사를 쓸 수 있을지, 대통령실 내부의 분위기와 특별한 관심사는 어떤지 등 그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행태를 예상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추진이 어떻게 귀결될지 가늠할 수 있다. 정책담당자 개인에게 있어 내부 이해관계자는 주로 상급자를 말한다. 상급자는 정책을 파기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이해와 예측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책의 정치적 수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이해관계자의 범위가 달라질 것이다.
각 주체들은 각자의 생리를 갖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역학을 완전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역량도 시간과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축적될 수 있다. 이 정책이 말이 되냐고 상급자로부터 욕먹고, 언론에서도 몰지각한 정책이라고 욕먹고, 국회에서 지적당하고, 시민단체가 담당자 좌천하라고 시위하고, 감사원으로부터 시달리는 그런 경험이 쌓이다보면, 점차 감각이 기민해진다. 문제 없이 정책이 진행될 정책 방향, 문장의 늬앙스, 보도자료 시점 등을 정리해내는 능력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반복적인 행정업무도 긴 시간을 잡아 먹는다. 국회 등 정부 외부 뿐 아니라 국무조정실 등 타 행정부처, 또는 같은 부처 내 다른 부서에서 각종 요구가 쏟아진다. 정부 내에서 ’찌라시‘라고 불리는 데 그 양이 상당하다. 대부분의 요구가 내용은 가볍지만 대응을 위해 따라야 하는 절차와 문서형식이 있고, 이게 대량이 되면 시간소요가 상당하다. 그래서 이러한 찌라시들은 의사결정과정 중 하나가 맞긴 하나, 매우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소통과 수고를 만들어내며, 단순 행정업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관의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좀먹고, 업무흐름에 큰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다
문서 양식이나 부처 내외의 정보소통방식에 공유문서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행정업무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인 업무혁신은 추진할 주체도 없고 동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긴 노동 시간으로 구시대 기술을 보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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